현진 스님

현진 스님

  소승이 기거하는 앞마당에 매실나무에서 새파랗게 몽울지는 새순이 봄이 왔음을 알린다.읍내에 일이 있어 잠깐 나가 봤는데 이름 모르는 하얀꽃도 활짝 핀 것이 봄이 확실이 왔음을 느끼게 한다. 전 세계를 두려움과 불안으로 몰아넣고 우리나라에서도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도 또 국민들 서로간에 반목과 갈등으로 힘들게 했던 코로나19도 이제 떠나갈 때가 온 것 같다. 봄이 온 것처럼 모든 어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희망의 시간이 될 것이라 믿는다. 인간의 삶에서는 끊임없는 사건 사고 자연재난등과 대면하며 살게 되어있다. 과연 이러한 시련이 있을 때 우리 인간은 어떻게 대비해고 살아야 할까 을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해답을 경전이라는 곳에서 찾아 보기로 해 보자. 경전(經典)에서 경(經)이라고 하는 글자가 품고 있는 의미가 어쩌면 삶의 나침판이 함축되어 포함되어 있으리라 생각 한다. 경(經)자는 진리(眞理)을 담고 있는 글들을 총칭해서 경(經)전(典)이라고 한다. 경(經) 다음에는 서(書)라고 한다. 사서삼경(四書三經) 도덕경, 불경, 성경등이 있다. 예전에선 성경을 성서(聖書)라고 불리던 시절도 있었다. 현대에서 서(書)에서 경(經)로 격상을 시킨 것이다.

그러면 과연 경(經)에는 어떤 비밀이 숨어 있으며 어떻게 삶의 나침판과 같은 길잡이를 해줄 수 있을까? 경(經)자를 씨줄 낱경 이라고 한다. 씨줄은 베를 짤 때 베틀 위에서 아래로 베줄이 내려져 있는 기준이 되는 베줄이며 이것은 변화지 않고 고정되어져 있는 줄이다. 이 씨줄 사이를 한 줄 한 줄 엇각으로 끼어나가는 줄을 날줄이라고 한다. 이로써 한결같은 삼베의 옷감을 짤 수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씨줄이다. 씨줄은 항상 일정한 법칙으로 변함이 없는 우주 자연의 법칙이며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법칙이 아니다. 춘하추동, 생로병사, 성주괴공, 생주이멸 등 이러한 법칙이 이미 질서 즉 법칙(法則)으로 존재하며 이것을 컴퓨터를 예를 들면 이미 프로그램이 세팅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 법칙의 이치를 알아 날줄을 제대로 끼어야만 괴로움에서 벗어나 한결같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신앙을 믿던 그것도 중요 하지가 않다. 무엇을 믿던 그것은 각자의 생각일 뿐이다. 우주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 새로운 법칙이 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법이 따로 있고 불교의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는 두 법이 존재 할 수 없으며 오로지 한 가지 법칙으로 돌아가고 있고  한 가지 법만 존재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 법칙, 프로그램에 맞게 살아야 하며 이 법칙은 누가 더 이쁘다. 밉다 판단하지 않고 똑같은 대우를 해준다. 심지어 범죄자들 조차도 분별 하지 않고 똑 같은 편의와 불편을 제공해 준다. 다만 씨줄의 법칙만 잘 알고 날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이 가장 중요 하다. 종교라는 것은 씨줄을 알고 날줄을 끼는 방법에서 본인들이 주장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고 그 방법만을 신앙하고 그것을 교리화 시킨 것이다. 이것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색중 하나인데 어쩌면 가장 바보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대자연의 다른 유기체들은 그러한 신념체나 이데올로기 종교 등이 없어도 스스로 자연과 상호 작용을 하며 씨줄에 맞춰 날줄을 끼며 일생을 사며 씨줄의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간다. 유독 인간만이  복잡하게 이것저것에 의미을 부여하여 그 생각에 붙들려 씨줄에 맞춘 생활이 아닌 본인생각, 집단생각으로 씨줄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여 수많은 괴로움을 초래하며 산다. 그것의 산물인 과학 문명과 의료의 발달이 최첨단이 되었는데 우리 인간이 과연 그 발전에 비례하여 행복한가는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씨줄은 우리에게 씨줄을 벗어난 생각으로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한 씨줄을 벗어난 마음을 방하착(放下着) 내려놓음을 원한다.
그러면 면역력도 상승되고 자연의 법칙이 변화할 때 우리의 신체도 능동적으로 적응하여 앞으로 다가올 미지의 바이러스와 마음의 질병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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