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 스님

현진 스님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세상은 시간상 시점으로는 지금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내일을 살아본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이 아닌 ‘저기’라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살기도 하고 과거의 어느 시점에 살기도 한다.

 하지만 내일이나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과거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의 습관이 빚어낸 환상을 철저하게 믿기 때문에 착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허구의 날들이다.

 우리는 이런 허구의 날들로 인해 수많은 시간들을 소비하고 늙어가고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인생은 그 허구의 시간에서 벗어나 지금에 사는 것이 가장 큰 삶의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만 해 봐도 이것은 바로 증명이 되는 것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도 과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시점에서 떠올리는 것이고 미래를 그려보는 것도 미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점에서 그려보는 것임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삶이란 지금의 시점에만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과거 와 미래에 지금에 생각이 분주하게 오고 가는 삶을 살기 때문에 세상이 굉장히 복잡하고 어렵다고 생각하고 힘들어한다. 오롯이 지금에만 존재한다면 마음은 고요하고 여유고 단조로울 것이다. 그러나 과거, 미래라는  마음의 허상을  실제 존재하는 실상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므로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마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맛보고 경험한 것이 각이 다르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 종교를 신앙하는 것도 이와 같아 참 종교인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거꾸로 신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이 듣고 보고 배운 것을 신은 이럴 것이다라고 마음속에 한정 짓고 그것이 자신이 믿는 신앙의 대상으로 만들어 믿고 예배를 하고 있다.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마음의 상을 믿는 것이므로 자기의 마음에 지나간 과거에 조각된 신을 믿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상이 되는 것이다. 신들조차도 인간에게서 존재하려면 지금이라는 시점에서만이 온전히 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환상과 허상은 자각을 할 때 실상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환상과 허상이 무너져 버릴 것이 두려워 신념을 강화하고 미래의 목표를  상정해 놓고 나아간다. 목표와 꿈은 삶을 살면서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태우는 것과 다름없다.

 그럼 어떻게 과거 미래의 허상과 환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첫 번째 방법은 마음에 동요 없이 은은히 가는 것이다. 한마디로 목표에 대한 집착보단 자신의 삶을 옥죄이고, 괴로움의 원흉이 되지 않을 만큼만 노력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불만족하는 마음을 만족으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잘하려는 욕심 때문에 지적을 받으면 스트레스를 받기 나름이다. 하지만 이를 화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세 번째로는 아까 말했듯이 목표를 상정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님들이 수행을 할 때 저 넘어 세상 속에 불국토가 있고 지상천국이 있다는 상을 만들어 놓고 그 상을 없애지 못하면 평생을 수행을 해도 실상의 맛은 보지 못하고 하릴없이 일생을 허비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고 소유할 수도 없다, 다만 가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만이 가질 수 있다. 그래서 바꿀 수 없는 과거와 일으키지 않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이 순간‘ 조차 집착하지 않는다면 대 자유인이 될 것이고 대 평온이 찾아올 것이다.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이 순간에 사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과거와 미래로  자신을 불태우지 말고 지금에 살기를  간절히 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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