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삶 품고 외적 막아

 

김해에는 김해읍성이 있다. 김해 백성의 삶을 품고, 외적의 침입을 막았다. 김해읍성은 일제강점기 시절 정책적으로 파괴됐고 최근 복원됐다. 김해읍성은 일부 권력자나 특정집단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평시에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택해 축성했다가 유사시에 백성이 성 안으로 모두 들어와 보호받으면서 함께 지킨 곳이다.

 백성의 삶 품고 외적 막아
 한국만의 독특한 성곽제도
 세종 16년(1434년) 축조

 일제감정기때 정책적 파괴
 기단석, 허튼층쌓기 조성

 

 현대식 건물이 즐비한 세상, 우리는 성(城)의 흔적을 유적이라고만 여긴다. 성은 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깊이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 것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준 채 우리는 고풍스러워 보이는 그 풍경을 구경하거나,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는 발걸음을 옮긴다. 김해에는 김해읍성이 있다. 김해 백성의 삶을 품고, 외적의 침입을 막았다. 김해읍성에 배어있는 이야기는 세종시대부터 시작된다.

 조선은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했다. 백성들을 지극히 아꼈던 세종은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세종 때부터 경상도·전라도·충청도의 바다가 가까운 지역의 읍성들이 새로 축조되거나, 고려시대에 세워진 읍성이 개축되었다. 읍성은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한국만의 독특한 성곽제도로 전쟁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려는 애민사상의 발로이다.

 조선의 읍성은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성벽의 높이를 높이면서 옹성, 치성, 해자를 시설하도록 중앙정부에서 감독했다. 옹성(甕城)은 성문의 양쪽에 쌓아 문을 공격하는 적을 방비한다. 치성(雉城)은 성벽의 바깥에 네모꼴로 튀어나오게 벽을 쌓아 성벽에 바싹 다가선 적병을 비스듬한 각도에서 공격하게 하는 시설이다. 성벽의 둘레에 도랑을 파서 만드는 해자(垓字)는 적병을 진입을 막는다. 읍성을 세우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지방의 수령들이 부임지에서 지내는 기간 중에 반드시 지켜야 할 근무지침에는 성을 보수하는 항목이 들어 있었다. 또한, 읍성을 쌓고 나서 5년 이내에 무너지면 죄를 삼고, 견고히 쌓으면 상을 준다는 규정도 마련되어 있었다. 성은 외적을 효과적으로 방비하기 위해 견고하게 마련한 군사적인 방어시설물이었기에 소홀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부 권력자나 특정집단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평시에 방어에 유리한 지점을 택하여 축성하여 두었다가, 유사시에 백성이 성 안으로 모두 들어와 보호받으면서 함께 지켰다. 백성들은 성의 너른 품에 기대어 살았다.
 
 현존하는 읍성은 많지 않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는 읍성의 존재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현 남부지역에 69개소, <동국여지승람>에는 95개소, <동국문헌비고>에는 104개소의 읍성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읍성은 내륙지방에는 비교적 큰 고을에만 있었고, 해안 근처의 고을에는 거의 모두가 있었다.

 김해읍성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세종 16년(1434)에 축조된 석성이다. 해자와 옹성은 문종 1년(1454년)에 추가로 건설됐다. 길이가 1,950m에 이르고, 동서남북 4대문을 갖춘 평지성이다. 동쪽은 동해문(海東門), 서쪽은 서해문(海西門), 남쪽은 진남문(鎭南門), 북쪽은 공진문(拱辰門)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받았다.

 산성과는 반대로 평지에 들어선 성곽을 평지성이라고 한다. 산이라는 지형지세를 활용할 수 없기 때문에 방어에 불리한 듯 하지만 공간활용이나 관측, 수원 확보 등에는 유리한 면이 있다. 김해의 진산(鎭山)인 분산의 정상부에 있는 분산성(盆山城·국가사적 제 66호)과 함께 김해읍성은 오랜 세월 김해를 지켜왔다.

 그러나 일제감정기때 읍성철거정책이 시행됐다. 김해읍성 역시 고종 32년(1895) 이후 거의 흔적이 없어졌다. 아직 조선의 왕이 있었으나,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혈안이었던 일본이 읍성철거정책의 배후였을 것이다. 김해읍성은 그렇게 파괴됐다.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존속되었던 다른 지역의 읍성들도 일본에 의하여 대부분 헐렸다.  

성벽은 파괴됐지만, 치성의 기단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발굴된 김해읍성은 앞으로 연구와 복원, 정비사업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복원된 김해읍성 북문과 옹성이다. 2006년부터 약 2년간 전면 발굴을 하고, 발굴된 자료와 각종 문헌자료를 참고하여 2008년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 이후에도 김해읍성 성벽을 따라 많은 발굴이 이루어졌으며, 동상동과 서상동 일대에 잔존하고 있는 성벽도 확인됐다.

 2017년에는 서상동 222-2번지 유적지에서 읍성의 서쪽 성벽 일부와 성곽을 방어하기 위해 바깥에 판 도랑인 해자 석축이 발굴됐다. 발굴된 성벽은 높이 2m, 길이 23m, 폭 5m로 일정한 크기(가로100cm. 세로100cm)의 면석을 사용해 쌓았고, 사이의 빈틈은 쐐기돌로 메워 견고하게 축조됐다. 또 해자의 석축은 성벽에서 9m 거리를 두고 성벽과 나란히 이어진 동쪽 석축으로 깊이는 140cm 정도다. 서쪽 석축은 현재 도로로 사용되고 있는 땅 밑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8년에는 북문지에서 동쪽으로 100m 떨어진 대성동과 동상동에서 각각 청동기시대 고인돌 여러 기와 김해읍성의 치성 기단석이 발굴되기도 했다. 도심지 내 기존 노후 주택을 철거하고 새로 단독주택을 세우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이다. 김해읍성의 치성의 기단석이 발굴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김해부내지도 등 옛 지도에 치성이 기록돼 있어 그 존재는 이미 알려진 상태였지만 발견된 적이 없었던 터였다. 조사결과 남아 있는 치성의 기단석은 2~4단이며 평면형태는 정사각형으로 밝혀졌다. 기단석은 허튼층쌓기로 조성했으며 앞으로 튀어나온 두 모서리는 둥글게 처리돼 있다.

 '허튼층쌓기'는 크기가 다른 돌을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는 방식이다. 성벽은 파괴됐지만, 치성의 기단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발굴돼 다행이다. 치성의 기단은 앞으로 김해읍성의 연구와 복원, 정비사업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21세기 김해의 주택가에서 치성이 발굴된 일은 김해가 오랜 역사와 문화, 전통을 지닌 곳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땅을 파면 또 뭐가 나올까”라는 김해사람들의 말은 진리였다. 앞으로 도시재생 과정에서 또 다른 유물과 유적이 나올지도 모른다. 

 긴 세월 오랜 풍파를 견디고 김해읍성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복원된 김해읍성을 보면서 그 아쉬움을 달래보자. 동상동 연자로를 따라 걷다 보면 김해읍성북문을 만날 수 있다.

 김해시는 흔적으로만 남아있던 돌무더기를 웅장한 성문으로 되살렸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서남북의 4대 성문 모두를 볼 수 없지만, 지표상에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 복원이 가능했던 북문을 볼 수 있다. 앞쪽에는 성문을 보호하는 반원형의 옹성이 둘려졌다.

 북문을 올려다 보면 공진문(拱辰門)이라고 쓴 현판이 있다. 공진문은 무슨 의미일까. 팔짱 낄 '공' 또는 두 손 맞잡을 '공'. '진'은 북쪽 또는 북쪽에 앉은 임금을 뜻한다. 세종의 명으로 세워진 성이니까, 두 손을 맞잡아 북쪽에 계신 임금께 예를 갖추며 김해를 잘 지키겠다는 다짐을 하는 의미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 활동을 펼치고 있는 강산문화연구원 관계자와 봉사자들이 김해읍성에서 읍성 주변 청소 등 봉사활동을 펼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성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상상하면 그 성벽이 본래의 자리를 찾아 뻗어가는 것 같다. 어쩌면 김해읍성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나는 김해읍성이다. 굳건한 바위들이 차곡차곡 쌓여 높고 길게 이어진 견고한 성벽이 보이는가. 왕의 명을 받아 착한 백성들이 힘을 모아 바위를 다듬어 하나하나 쌓아올린 성벽이다. 이 성벽 위에서 충정으로 가득한 의병들이 왜놈들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던 그 날을 잊지 말라. 성벽 아래 그늘에서 발걸음을 쉬던 나그네, 꽃을 따고 달음박질을 하던 아이들, 물동이를 이고 가던 여인들, 흙투성이가 되어 논밭을 일구던 사내들…. 수 백 년 세월이 흘러 본모습을 볼 수 없다 하여 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이 곳에 서 있다. 나는 김해읍성이다. 나의 주인은 김해이다."
 
 박현주 북 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김해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