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빈·김득기·이대형·류식

 

동상동 분산 가는 길 중턱에 위치한 송담서원(사진 오른쪽)과 명의제.

 송빈·김득기·이대형·류식
 사충신 충절 기리는 '사충단'
 '관' 도망쳤지만 백성과 맞서

 김해서 처음 번진 의병 '들불'
 김해성전투, 최초 의병 전투


 나라를 지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정말 나 자신을 고스란히 바쳐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나설 수 있을까. 그리 하겠다고 답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 대의를 아는 사람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신을 먼저 구하려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순국선열 앞에서 진심으로 몸을 낮추며 깊이 감사하는 것이다.

 이 나라가, 이 민족이 위기에 처했던 역사는 많다. 그 역사 앞에서 기꺼이 자신을 바쳐 나라를 구했던 사람들은 이 땅 곳곳에 사는 백성들이었다. 김해에도 그 고귀한 역사가 있다.

 1592년, 일본이 바다를 건너 조선을 침략했다.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일본은 1597년 조선을 재차 침략하는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1598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을 우리는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왜군은 조선을 침략하는 길에서 백성들의 첫 저항을 만났다. 김해의 의병이었다.

 우리는 역사 교과서에서 임진왜란의 의병에 관해 배우지만, 그 책에는 안타깝게도 김해의 의병이 없다. 하지만, 임진왜란 중에 조선 최초로 일어난 의병들이 김해에 있었다. 김해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송빈(宋賓·1542~1592), 김득기(金得器·1549~1592), 이대형(李大亨·1543~1592), 류식(柳湜·1552~1592)이다. 김해에는 그들의 공을 기리는 '사충단'이 있다. 경남도 기념물 제99호이다. 김해시 가야로 405번안길 22-9(동상동 161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사충단은 김해에서 조선 최초로 일어난 의병장 사충신의 이름과 충절을 기리는 곳이다.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원들이 사충단에 대한 설명을 강산문화연구원 관계자로부터 듣고 있다.

 선조 25년 4월,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왜군은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한 후 김해부성을 공격했다. 그 당시 김해부사 서례원과 경상우병사 조대곤은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그러나 김해의 백성들은 왜군에 맞서 성을 지켰다. 김해성전투이자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전투였다. 임진왜란 의병이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김해성전투의 의미가 크다.

 이 후 7년간 이어지는 전쟁 동안 온 나라가 왜군의 말발굽 아래 신음했다. 왕은 나라 끝까지 피란을 갔다. 그러나 이 나라 백성들은 나라를 구허기 위해 떨쳐 일어났다. 조선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 첫 번째 들불이 김해에서 타올랐다. 김해는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 발생지이다. 이병태 전 김해문화원장은 <김해인물지>에 네 의병장의 활동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을 중심으로 김해성의 전투를 다시 한 번 더듬어 보자.
 
 부산과 동래를 함락한 왜군이 부산 다대포를 지나 김해로 진격해 왔다. 송빈은 이대형과 함께 장정 100여 명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무과급제자인 김득기와 류식이 의병을 이끌고 합류했다. 송빈은 진영 하계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송담(松潭)이며, 중종 때 절제사를 지낸 송창의 아들이다. 김해부사 서례원이 송빈에게 왜군의 침략 문제를 함께 의논하기를 청했다. 송빈은 "김해는 영남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니, 김해가 무너지면 영남을 잃게 되고, 영남을 잃으면 나라가 모두 적의 것이 될 것이니,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이대형은 활천에서 태어났다. 부사 서례원과 인척간이었던 이대형은 함께 싸우겠다는 두 아들에게 집안을 부탁하고, 송빈과 함께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김득기는 부거인리(현 외동)에서 태어났다. 과거에 급제했으나, 향리로 돌아와 있었다. 17살이었던 6대 독자 아들이 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만류했으나 김득기는 자신이 입던 도포 한 벌과 머리카락 한 줌을 잘라 주며 결의를 보였다. 병중에 있던 아내에게도 작별인사를 한 뒤 김해성으로 들어갔다.

 류식은 하동면 산선(현 대동면 예안리 마산마을)에서 수군절도사를 지낸 류용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우리 집안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는데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겠는가?"하고 집안 사람들과 노비를 이끌고 김해성에 들어갔다.

 부사 서례원은 송빈에게 중군의 소임을, 김득기에게 동문의 수비를 맡겼다. 송빈은 밤을 틈타 군사 수백명을 이끌고 나가 김해성을 포위한 왜적 수백명을 죽이고, 죽도(현 가락면)까지 추적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위기는 시시각각 다가왔다. 김해성 턱 밑까지 몰려온 왜군은 성을 세 겹으로 포위했다. 김해성은 성벽이 높고 참호가 깊어 적이 접근하기 어려웠으나, 서례원 부사가 달아나버리자 수세에 몰렸다. 송빈·이대형·김득기·류식은 군사와 백성들을 독려하며 원군이 오지 않는 외로운 김해성을 지켰다. 왜군이 호계천(동상동과 부원동을 흐르는 시내. 지금은 복개되어 도로로 사용된다) 상류를 막아 성 안에 물이 끊겼을 때는 류식이 객관 앞의 땅을 팠는데 샘물이 솟아났다. 이 자리(동상동 874번지)에는 후손들이 '류공정(류공의 우물)'비를 세웠다.

 4월 19일 밤에 왜군은 허수아비를 무수히 만들어 성 안으로 던지고 군사들을 교란시키며 쳐들어왔다. 왜군은 김해 들판의 보리를 모두 베어 성 밑의 참호를 메우고 성벽과 동일한 높이로 쌓아올린 뒤 이를 밟고 성벽을 넘었다. 성 안에서는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송빈·이대형·김득기·류식은 투항을 권고하는 왜적을 꾸짖으며 남은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전력을 다해 싸우다 순절했다.

 김해성이 함락된 뒤, 송빈의 부하였던 양업손은 전사자들의 시체 가운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왜군이 깊이 잠든 틈에 성을 빠져나온 양업손은 당시의 전투상황과 마지막까지 전투를 이끌었던 송빈 등 네 의병장의 순절 소식을 전했다. 이 일이 조정은 물론, 온 백성들에게도 알려졌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선조 33년에 사충신에게 가선대부(조선시대 종2품 문무관의 품계)가 추증됐다.

 

사충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71년 고종의 명으로 건립된 묘단 사충단.

 사충단은 사충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71년 고종의 명으로 건립된 묘단이다. 사충단이 처음 세워진 곳은 동상동 873 자리였다. 이후 1977년 김해시의 도시계획으로 동상동 277-6으로 이전되었다. 김해시는 1995년에 사충단 성역화사업을 실시하며, 현재 위치인 동상동 161번지에 송담서원, 표충사, 사충단을 지어 모셨다. 표충사를 새로 건립할 때 류식도 함께 배향하여 사충신을 기리게 됐다. 표충사에서는 해마다 음력 4월 20일 사충신을 기리는 향례를 올리고 있다.

 

송담서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자원봉사단.

 동상동 분산 가는 길의 중턱에 위치해 있어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우리가 사충단이라 알고 찾는 곳은 송담서원이다. 서원의 여러 건물들 중 사충신을 기린 비석을 감싼 작은 비각이 사충단이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이다. 비각 안에 사충신이 추증받은 직함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송담서원의 멋진 풍광에 눈이 팔려 가장 위에 세워진 사충단을 못보고 지나치는 관람객들도 종종 있다.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어 평소에 많은 시민들이 찾는 곳은 아니다. 문득 발길이 이어진다면 꼭 한 번 가보길 권하고 싶다. 그곳에 서면 김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바쳤던 선조들의 기개와 의지가 느껴져 가슴이 뜨거워 질 것이다. 오늘날의 평안이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땅의 사람들이 지키고자 했던 약속이었음을, 그 약속을 오늘의 우리도 지켜야 하는 것임도 깨닫게 된다.

 박현주 북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강산문화연구원의 도움으로 작성됐습니다.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 문의/(재)강산문화연구원 055-337-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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