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 편집국장

 

허균 편집국장

 1988년으로 기억된다. 엉덩이가 펑퍼짐했던 당시 TV는 국회에서 열린 제5공화국 비리를 파헤치는 청문회를 전국에 생중계했었다. 멋진 얼굴은 아니었다. 호감이 가는 생김은 더욱 아니었다. 그때 그를 처음 봤다.

 매우 화가 나 있었다. 화가 난 그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고 정주영 회장을 쉴 새 없이 다그쳤다. 프로스펙스의 신화 고 양정모 회장에겐 측은한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그의 입을 떠난 말들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 좀 멋있는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변호사 출신이라 말을 잘 하네!' 딱 그 정도였다. 그의 첫인상은.

 청문회 스타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그는 이후에도 TV에 자주 모습을 비췄다. 노(勞)와 사(使)로 극렬히 대립했던 1980년대 분규 현장은 그의 주무대였다. 주로 작업복을 입었었고 소매는 반쯤 접혀있었다. 국회의원은 다들 그와 같이 옷을 입고, 그와 같이 행동하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된 건 시간이 한참 흐른 뒤였다.     

 가정을 꾸리고 직장생활을 하던 시기, 대통령 후보인 그를 다시 만났다. 물론 TV를 통해서다. 보수색이 짙었던 서부경남 출신이어선지, 지인들에게 '그가 대통령이 되어선 안되는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고 돌아다녔었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단지,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던 그를 부산 시민이 선택하지 않았는데, 대한민국 대통령 직을 맡겨서야 되겠느냐는 이유였다.
 
 박빙의 승부였다. 대선 하루 전 날 빅3 중 하나였던 정몽준 의원과 결별설이 터져 나왔다. 밤중에 정 의원의 대문을 두드리다, 돌아서며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방송 3사를 통해 전국으로 배달됐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살아났다. 두 번째 도전으로 1천만 표 이상을 얻은 이회창 후보였지만 그의 적수가 되진 못했다.  

 그의 청와대 생활은 순탄치 못해 보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깨어진 이의 입에서도 그의 이름이 새 나왔다. 그땐 그랬다. 모든 좋지 않은 일은 그의 탓이라 했다. 분위기 탓이었는지, 그땐 주위 사람들 모두가 그랬다.

 탄핵을 당하며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 직무가 정지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직무가 정지된 그는 노타이 차림으로 뒷짐을 지고 알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냥 그렇게 서 있었다. 사실 그땐 그가 왜 국민적 지탄을 받았는지, 탄핵을 당했는지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정치인에게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라는 말이 있다. 악플보다 무플로 그를 괴롭혔었나 보다.  
 
 "누가? 갱제 살린다 햇심미까?"

 봉하로 내려온 그가 마이크에 대고 한 첫마디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든 말이지만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곤  "참~ 좋다!"고 했다.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참으로 좋은 듯 보였다. 고향에 내려와 마냥 좋았을 것 같았지만 그의 마지막은 모두가 알듯 행복하지 못했다.

 전국의 눈이 서거 10주기 추도식이 열리는 봉하 마을에 쏠려있다. 김해 진영읍은 봄부터 가을까지 노란색, 귤색의 꽃을 피우는 메리골드 3천600본을 봉하 마을 가로변에 심었다. 그를 추도하기 위해 찾을 방문객들을 맞기 위해서다.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새로운 노무현'이라고 했다. 더 이상 슬퍼하지만 말고 미래를 향해 발을 내딛자는 의미일 게다. 마음 한 구석의  미안함으로 남아 있는 그의 추도식에 일을 핑계 삼아 찾을 생각이다. 그를 추도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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