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성자 시의원

 

하성자 시의원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그 쓸쓸하지 않음의 배경, 수필가는 그것을 '끓는 피'로 규정했다. 소위 7080 세대에게 있어 피천득 선생의 '청춘예찬'은 길이 돼 준 글이었다. '끓는 피'는 그 시대 아름다운 청춘을 일컫는 상징어였다. 그 시절을 풍미했던 청춘들은 시대의 절망을 딛고 새 길을 열어냈다. 그 청춘들이 은어처럼 펄떡펄떡 은빛 광채 빛내면 좋겠다. 그럼에도 이 터에서 사는 이 시대 청춘들에게 여기는 어떤 삶터일까를 생각한다.

 요즘 청춘은 상징어 '아픔'을 동반한다. 이 시대 청춘의 특징을 꼭 집어 낸 단어 '아픔', 김난도 작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오늘 날 청춘을 대변했다. 기성세대가 '왜 아픈데?'라고 질문할 가능성이 매우 큰 문제들이겠지만, 이 시대를 사는 청춘들에게는 심각한 현재일 것이기에 그 나름들 생채기 아픔을 감싸며 위로하고 싶다.

 '끓는 피'가 어디로 튈지, 발산하는 청춘의 특이적 현상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춘기들에게 '질풍노도'인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최근 청춘의 방황이 황망하게 분출된 안타까운 중학생 사건 관련 뉴스를 접하는데 가슴이 저며 왔다. 무르익지 않은 청소년들의 주체하지 못하는 과도한 정서가 폭발되는 현장에서 피폭당하는 또래 아이들에 대한 극단적인 사례가 보도될 때 혹시 어느 음지에서 어쩌면 환한 햇빛 아래서마저 공공연히 당하고, 각자의 어둠 속에서 통증 호소할 곳을 두리번거리는 두려운 아픔들을 근심하며 아픔을 끓이게 된다.

 학부모의 대표입장으로 학교 폭력문제 해결의 전면에 나선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때마다 안타까움으로 점철된 '어찌할 수 없음',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는 '어찌 할 줄 모름' 으로 생겨난 그 혼돈으로 인해 힘들었었다. 피해자, 가해자, 가담자 모두 어린 학생들이었기에 언제나 다른 방향의 피해자들이란 사실이 아팠었다. 양측 부모들 슬픈 눈빛이 잊어지지 않는다. 흔히 '선생은 있어도 스승이 없다'라고들 하지만 애정과 훈육의 간극에서 곤혹스러워 하시던 선생님들 고민을 지켜봤었다.

 '어리니까 그럴 수 있지' 라는 한계를 넘어선 청소년 폭력문제가 마침내 사회문제가 됐을 때 재판 결과는 새로운 슬픔이 된다. 엄정한 기강을 유지해 내지만 사회를 아픔으로 이끈다. 앳된 청춘들이 왜 아픔을 양산하는 쪽으로 튀어버렸을까? 어른에게서 해답을 구하려는 간절한 심정을 숨기고 싶지 않다. 그들을 선한 시민으로 성장시켜 줄 방안을 찾아 깊이 고민하게 된다.

 그들이 배운 도덕과는 다른 모습들은 뉴스마다 적나라한 현실이 돼 아이들 정서 속에 익숙함으로 침잠한다. 생활 속에서, 혹은 뉴스를 통해 만나는 사건들은 우리 사회 양상의 전부가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전부인양 인지되게끔 미디어는 유도한다. 핫 이슈가 된 나쁜 뉴스는 너무 가깝다. 청춘들은 클릭으로 뉴스 제목과 내용을 무삭제 흡수한다. 그런 무성한 뉴스들이 아이들 정서를 교란시키는 것은 아닐까?

 교육은 선을 지향하고 인도하지만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범위가 더 크게 다가오는 중간 지점에서 선악은 애매모호해지고 시민의식은 뒷전이 돼 버린다. 소위 성공지향, 그 정점이 종점인양 부각되는 사회분위기는 '청춘의 덫'에 한 몫을 더한다. 사랑이 진정한 힘이란 것, 그것이 결국 승리 비결이란 주제가 낯선 얼굴처럼 어색해지는 사회가 되어선 안 되는 거다. 

 배려로 사람의 숲을 이뤄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자. 따뜻한 가슴에 사랑을 가득 담아서, 살아있음의 행복을 힘듦과 비교도 안 될 큰 기쁨으로 존재를 대하자. 자아존중, 다른 사람에의 존중이 조화롭게 어우러지면 청춘들은 그렇게 물들어지지 않을까. 청춘이 있어 인간이 쓸쓸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희망 청춘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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