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인만 아는 숨은 명소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호로 등록 돼 있는 봉황대 유적지에는 습기나 동물로부터 곡식이나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지어진 고상가옥 등 옛 가야인의 주거양식을 살펴볼 수 있다.

 김해인만 아는 숨은 명소
 국가문화재 사적 제2호

 봉황이 날개 펼친 모양
 역사 흔적·의미 알려야
 일제강점기 세상에 알려져

 

 올해도 김해의 봄꽃은 흐드러지게 피었고,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김해시는 지난 4월 1일, 나들이 장소를 고민하는 가족들을 위해 봄꽃 만개한 명소 8곳을 1일 소개한 바 있다. 늘 꽃이 피었던 곳이고, 내년에도 그 다음에도 봄꽃이 필 곳이다. 김해시가 뽑은 봄꽃 명소 장소는 연지공원, 가야테마파크, 수로왕비릉과 구지봉, 대청천, 국립김해박물관, 낙동강레일파크, 가야문화축제 그리고 봉황대 유적지다.

 봉황대 유적의 봄꽃은 인터넷에서 '김해사람들만 아는 숨은 명소'로 유명하다. 반가운 말이기는 하지만, 봉황대 유적까지 와서 봄꽃만 보고 간다면 서운하다. 김해의 오랜 옛날, 금관가야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가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봉황대 유적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사적 제2호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다른 시기의 조개더미와 다양한 무덤 유적이 있다. 역사적인 사실이나 의미를 잘 모른다 해도 사람들은 이 곳을 금관가야시대 사람들의 생활 유적지로 알고 있다. 김해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어릴 적 이 근처에서 놀다가 땅을 조금만 파도 조개껍데기가 나오던 일을 기억할 것이다.

 봉황대라는 아름답고 화려한 이름은 언덕이라기엔 크고, 산이라기에는 낮은 구릉의 형태에서 왔다. 구릉의 생김새가 봉황이 날개를 펼친 모양이다. 하늘에서 한번쯤 내려다보고 싶다. 땅을 박차고 하늘로 곧 날아오를 것만 같아 붙여진 이름이라니 더 근사하게 느껴진다. 왕궁터 발굴지에서 봉황대 돌계단을 하나씩 오르면 길 양편으로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숨 막히도록 아름답다. 여름이면 녹음이, 가을이면 단풍이, 눈이라도 오는 겨울날에는 설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김해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여의낭자와 황세장군의 슬픈 사랑이야기도 봉황대를 배경으로 전해진다. 재미삼아 인터넷에서 '봉황대 산책'이나 '봉황대 소풍' 등으로 검색 한 번 해보시라.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사진이 올라와 있는지 모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봉황대 유적이니 만큼 역사의 흔적과 의미를 더 알리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백과'에서는 봉황대 유적지를 '김해시 봉황동·회현동에 있는 청동기시대의 무덤과 삼한∼삼국시대의 생활유적이 혼재된 복합유적'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라니, 참으로 아득하다. 그 까마득한 시간에 이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봉황동유적 패총전시관 전경.

 봉황대가 역사 유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봉황대가 있는 독립구릉과 주변 지역 일대의 유적은 1907∼1935년 일본에 의해 수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며 '김해 회현리조개더미'로 널리 알려졌다. 그 뒤에 1991년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사적지정구역을 제외한 봉황대 구릉의 전체에 대한 시굴조사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며 유적의 전체 성격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청동기시대에는 고인돌과 돌널무덤이 일부 조성되었고, 삼한시대부터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게 됐다. 인근에서 호안석, 접안시설, 수상가옥지 등이 조사되어 금관가야의 중심지로 추정되고 있다. 가까이 있는 대성동고분군과 함께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발굴 유물로 토기와 숫돌, 골각기, 철손칼, 목제빗, 복골, 동물뼈 등이 출토됐다. 토기에는 연질(연질 및 와질)의 독과 바리, 그릇받침, 항아리, 시루, 작은 그릇받침, 화로모양토기 등과 경질(도질)의 굽다리접시, 항아리 등이 있으며, 골각기에는 손칼자루, 골화살촉, 치레걸이, 첨두기, 낚싯바늘 등이 있다.

 가야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집을 짓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었을까. 가야는 기록이 없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외에는 가야인의 생활과 습속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고고학적 발굴조사는 매우 중요하다.

 봉황대 유적지 발굴조사는 가야의 주거생활을 밝혀냈다. 유적지 안내판에서 그 내용을 읽을 수 있다. "가야의 일반적인 가옥은 얕은 수혈을 파고 만든 움집 형태로 온돌시설과 취사, 난방을 겸하는 부뚜막 등이 잘 구비되어 있다. 또 지금의 원두막과 비슷하게 생긴 창고 용도의 고상가옥도 만들어 습기나 동물로부터 곡식이나 귀중품을 안전하게 보관하였다." 이 설명을 보면서 가야인의 집을 상상해보는 것은 가야역사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발굴된 철기에 녹과 함께 부착된 섬유 흔적을 보면 면, 삼베, 비단 같은 직물로 옷을 지어 입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옷의 형태는 고분 벽화 등을 참조해볼 때 긴 저고리와 바지. 폭이 넓은 치마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소박하지만 은은한 멋이 있다.

 식생활은 벼농사가 주업이었지만 그 밖의 곡물도 재배했다. 굴 백합 등의 조개류를 채취하고, 물고기도 잡고, 사냥도 했다. 시루와 취사용 그릇, 조리용 도구들이 발굴되는 것은 가야인들이 다양한 조리법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봉황대에 잇닿아 있는 김해패총은 봉황대 유적지에서도 가장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패총(貝塚)은 선조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여 지층을 이루고 있는 조개무더기 유적을 말한다. 1907년 우리나라 발굴역사상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다. 회현리 패총으로도 불리는데, 이곳의 옛 지명이 김해군 김해면 회현리였기 때문이다.

지난달 20일 강산문화연구원 산하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 활동 모습.

 김해패총은 노출전시관 형태이다. 전시관 지붕 모양이 조개껍데기처럼 보인다. 왜 이런 곳에 패총이 있을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곳은 낙동강가의 살기 좋은 구릉지대였기 때문이다. 바닷가 어촌을 지날 때 산더미처럼 쌓인 굴이나 조개껍데기 무더기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땅 속에 묻혀 완전히 썩거나 흩어지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것이 패총이다.

 김해패총에서는 조개껍데기뿐만 아니라 돌로 만든 유물, 짐승뼈로 만든 유물, 토기류, 철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그중에는 중국 한나라 때 통용되던 '화천'(貨泉)이라는 화폐도 있었다. 서기 14년에 만들어진 화천이 발견된 것은 김해패총 유적의 절대연대를 밝히는 귀중한 근거이다. 김해지역이 가락국이 성립(42년)되기 이전부터 중국과 왕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조개껍데기는 다양한 종류가 발견됐다. 굴, 꼬막, 홍합, 고동, 백합, 다슬기…. 우리도 익히 알고 있고, 또 현재도 먹고 있는 조개를 까마득한 시대의 선조들도 먹었다니 신기하다.
 
 무엇보다 압권인 건 패총의 단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저 흙은 언제부터, 저 조개는 언제부터, 생각해본다. 자연스럽게 쌓이고 쌓였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패총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다. 제목만 그럴 듯하게 붙인다면 현대미술 작품 같기도 하다.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봉황대 유적에 가면, 자연풍경만 즐기지 말고 안내간판도 꼼꼼하게 읽어보길 바란다. 유물과유적도 유심히 보자. 모두가 김해의 살아있는 역사다.

 박현주 북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강산문화연구원의 도움으로 작성됐습니다. 누리봄 문화유산 자원봉사단 문의/(재)강산문화연구원 055-337-2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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